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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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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어스름한 저녁, 동네 친구들과 간단히 술 한잔 기울일 때면 빠질 수 없는 것이 여자 이야기, 그리고 종종 첫사랑의 이야기다. 특히 남자들에게 첫사랑의 기억은 대개 특별하다. 혹자는 평생을 간직하고 살게 되는 기억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리고 적어도 내 주변 남자들은 어느 정도 그런 편인 것 같다. 조금 지질하지만 가슴 아픈 짝사랑, 외사랑 이야기에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활화산같이 불태운 영화 같은 사랑 이야기까지 레퍼토리도 각양각색이지만, 이들의 내러티브에도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결말의 미완'이 아닐까 한다.


첫사랑의 결말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를 이야기했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진화 과정 속에서 인간의 집단 무의식 속에 각각 내재하는 남성의 여성적 원형과 여성의 남성적 원형이다. 즉, 남성이 생래적으로 여성에 투영하는 완벽한 이성상이 아니마, 여성이 생래적으로 남성에 투영하는 완벽한 이성상이 아니무스인 것이다.


첫사랑이란 어쩌면 이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이성에게 처음 투영하게 되는 경험이다. 남성이 여성에게 첫눈에 반할 때 혹은 그 반대의 경우에도 우리는 상대방이 세상에  다시없을 천사나 여신처럼 보이는 경험을 한다. 그녀 혹은 그는 똥도 안 싸고 코도 안 풀고 이슬만  먹고살 것이라 생각하며 무의식 속 여신상(女神像)과 영웅상(英雄像)을 투영하고 경배한다. 그러나 현실의 이성은 이 완벽함과는 거리가 있는 평범한 인간이기에 첫사랑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다.



정신 차려보니 옆자리에 오징어가 흐물거리고 있음을 깨닫는다


첫사랑의 착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연애기간에 비례해서 이성에 대한 실망 역시 커지기 때문이다. 이 때 뜨거웠던 감정은 결국 식어버리고 실망의 책임은 상대 이성에게 씌워버리며 안타까운 결말을 맞이한다. 첫사랑의 상처가 깊은 까닭은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에 따른다. 처음이기에 더욱 간절하고, 처음이기에 더욱 아픈 법이다. 짝사랑이나 외사랑의 경우는 심지어 이 착각에 실망할 기회조차 없다. 이들에게 첫사랑 이성의 완벽함은 평생 타인을 통해 지워낼 수 없는 각인이 되어버린다. 어쨌든 첫사랑의 결말은 대체로 해피엔딩이 아닌 미완의 아련한 아픔으로 남는다.


망각

철학자 니체는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 했다. 우리는 자신에게 불리한 기억이나 충격적인 과거에게서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이러한 기억을 무의식의 저편으로 숨겨버리고 방어기제를 만들어낸다. 아무리 오밤 중 이불 킥할만한 창피한 기억이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미해짐이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왜 첫사랑의 기억은 평생을 간직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자이가르닉 효과(Zeigarnik effect)

러시아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자이가르닉이 어느 날 레스토랑에서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웨이터들은 대체로 손님이 어떤 주문을 했는지 신기할 정도로 잘 기억하는 편인데, 유독 먼저 계산을 마친 손님의 경우에는 주문내역을 쉽게 기억해내지 못하는 현상을 발견한 것이다. 자이가닉은 곧장 지도교수와 함께 한 가지 실험을 했다. 먼저 학생들을 두 그룹(편의상 A와 B라 하자)을 나누어 간단한 과제를 주었는데, A그룹의 학생들은 과제를 끝마치도록 두었고, B그룹의 학생들은 과제를 하는 도중에 중단시켰다. 그 후 실험에 참가한 각 그룹의 학생들에게 과제를 얼마나 잘 기억하고 있는지 조사를 했는데, 과제를 중단했던 B그룹이 A그룹보다 2배 가까이 잘 기억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Heart by Issac Grant, Dribbble.com, https://goo.gl/JhUOw4


미완성 효과라고 불리기도 하는 자이가르닉 효과는 완성되지 않은 일에 대한 심리적 긴장감이 뇌리에 깊게 남는 현상을 이야기한다. 꿈을 꾸다 중간에 깨어버린 경우나 영화와 드라마의 열린 결말, 틀린 시험문제, 아직 갚지 못한 빚, 미완성인 게임의 업적과 퀘스트 등 자이가르닉 효과는 일상에서 의외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첫사랑이 잊히지 않는 이유

사랑도 마찬가지다. 조금 지질하지만 가슴 아픈 짝사랑, 외사랑 이야기에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활화산같이 불태운 영화 같은 사랑 이야기까지 첫사랑의 결말은 대체로 해피엔딩이 아닌 완성되지 않은 아련한 기억으로 남기에 쉬이 잊히지 않는다. 물론 첫사랑이 무조건 잊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그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 현재 진행 중이거나 진행되어야 할 사랑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기에,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기억을 완결 지을 필요는 있다.


"It's a just a house"


픽사의 영화 업(UP)에서 주인공 칼은 더그와 러셀 그리고 케빈을 구하기 위해 아내와 못다 한 약속을 간직한 집을 떠나보낸다. 괜찮으냐고 묻는 러셀에게 칼이 대답한다.

"It's a just a house"

칼은 집을 떠나보내고 나서야 아내와의 약속, 과거의 굴레에서 해방되었다.





       All works ⓒ Jaehyun Kim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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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5.01 20:48 신고 수정/삭제    답글
    직접 쓰신건가요? 거의 특집 기사 수준으로 잘 쓰셨네요! 글이 되게 깔끔해요!

    그건 그렇고 첫사랑이 잊혀지지 않는 것도, 그리고 첫사랑이 거의 실패로 끝나는 것도 다 심리학적인 이유가 있었던 거군요.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에서도 비슷한 무언가를 본 것 같아요. 첫사랑인 왕자와 자신의 이상인 영원불멸의 영혼을 동일시해서 왕자에게 연정을 품지만 결국 실패하잖아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구독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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